글쓰기의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다.
조금 덜 읽더라도 더 많이 생각하고 메모하려고 애쓴 덕이다.
그 바람에 깊이 뿐만 아니라 읽는 양도 실제로는 전보다 더 낫고,
책상과 책상 사이에 놓여 있는 어떤 길이든 생각하며 걷다보면

그런데 책속의 여백이 다른 평면들보다 좋은 이유 중 더 근본적인 것은
책이란 것이 글쓴이의 추상적인 사고와 감정을 매개하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내가 만지고, 냄새맡고, 긁어보고, 더러 찢을 수도 있는
매우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인공물(artifact)이기 때문이다.
책은 이를테면 지혜의 여신이나 뮤즈가 어느날 홀연 대시인이나 철학자의 오른쪽 어깨 위에 사뿐히 내려 앉아
불러 주는 선험적(先驗的 transcendent)인 메시지를 그의 의식을 통해 받아 적어 놓은 것이 아니다.
책이 생산되기 위해서는, 글쓴이의 초고를 받은 편집자가

이처럼 복잡한 책의 생산 과정을 거치는 동안 글쓴이의 추상적인 사고와 감정은
물론 독자로서 내가 책의 여백에 깨알 같은 글씨로 독서의 흔적을 남기는 것도
우리가 책이라고 부르는 그 인공물이 거쳐가는 길고 복잡한 순환 과정의 일부다.

조금 덜 읽더라도 더 많이 생각하고 메모하려고 애쓴 덕이다.
그 바람에 깊이 뿐만 아니라 읽는 양도 실제로는 전보다 더 낫고,
책상과 책상 사이에 놓여 있는 어떤 길이든 생각하며 걷다보면
어느새 평소보다 조금씩 짧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또 그런 길 위에서 떠오르는 아이디어가 끊이지 않아,
어떤 생각이 사라지기 전에 옮겨 적으려 하다보니
책상 앞에 앉자마자 바로 집중을 하게 된다.
요즘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는 것이지만,
내 경우에(도) 좋은 글은 대개 꼼꼼한 읽기에 따르는 참신한 생각을 메모해 놓은 데서 시작된다.
또 그런 메모는 별도의 노트에 곧바로 일목요연하게 정리되는 경우도 없진 않지만
그보다는 비좁은 책의 여백에 그때그때 연필로 썼다가 지우고 다시 고쳐쓴
깨알같은 문장들(marginalia)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더 많다.
또 그런 길 위에서 떠오르는 아이디어가 끊이지 않아,
어떤 생각이 사라지기 전에 옮겨 적으려 하다보니
책상 앞에 앉자마자 바로 집중을 하게 된다.
요즘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는 것이지만,
내 경우에(도) 좋은 글은 대개 꼼꼼한 읽기에 따르는 참신한 생각을 메모해 놓은 데서 시작된다.
또 그런 메모는 별도의 노트에 곧바로 일목요연하게 정리되는 경우도 없진 않지만
그보다는 비좁은 책의 여백에 그때그때 연필로 썼다가 지우고 다시 고쳐쓴
깨알같은 문장들(marginalia)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더 많다.

marginalia
왜 그런 건지 꼭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널찍한 백지나 노트, 혹은 워드프로세서의 너른 화면보다는
책 속의 그 좁아 터진 여백이 내게는 글쓰기를 시작하기에 더 좋은 자리다.
글쓴이의 텍스트에 바로 끼어들거나 질문하면서
시각적으로 더 가까운 거리에서 대화할 수 있어서 좋기도 하고,
완전히 비어 있는 면을 앞에 두었을 때처럼
글의 방향이나 얼개를 좀 덜 의식하는 대신
순간순간 떠오르는 생각들을 속도감 있게 진행시킬 수 있어서 또한 좋다.
널찍한 백지나 노트, 혹은 워드프로세서의 너른 화면보다는
책 속의 그 좁아 터진 여백이 내게는 글쓰기를 시작하기에 더 좋은 자리다.
글쓴이의 텍스트에 바로 끼어들거나 질문하면서
시각적으로 더 가까운 거리에서 대화할 수 있어서 좋기도 하고,
완전히 비어 있는 면을 앞에 두었을 때처럼
글의 방향이나 얼개를 좀 덜 의식하는 대신
순간순간 떠오르는 생각들을 속도감 있게 진행시킬 수 있어서 또한 좋다.
그런데 책속의 여백이 다른 평면들보다 좋은 이유 중 더 근본적인 것은
책이란 것이 글쓴이의 추상적인 사고와 감정을 매개하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내가 만지고, 냄새맡고, 긁어보고, 더러 찢을 수도 있는
매우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인공물(artifact)이기 때문이다.
책은 이를테면 지혜의 여신이나 뮤즈가 어느날 홀연 대시인이나 철학자의 오른쪽 어깨 위에 사뿐히 내려 앉아
불러 주는 선험적(先驗的 transcendent)인 메시지를 그의 의식을 통해 받아 적어 놓은 것이 아니다.
책이 생산되기 위해서는, 글쓴이의 초고를 받은 편집자가
(작가의 동의를 얻기도 하지만 때로는 임의로) "교정"을 하고
다시 출판업자가 넘겨 받아 출판 목적에 맞는지 "내용"을 점검한 후 식자공(typesetter)에게 넘기고,
다시 출판업자가 넘겨 받아 출판 목적에 맞는지 "내용"을 점검한 후 식자공(typesetter)에게 넘기고,
(영국의 경우에는 영어가 표준화되는 16세기 후반,
우리의 경우에는 아마도 한글 맞춤법 통일안이 생긴 1933년 이전까지는)
다시 그 식자공(혹은 그의 조수)가 인쇄에 앞서 각 출판업자마다 제각각인
구두법 원칙에 맞게 원고를 재수정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그렇게 여러 차례 수정된 원고에 따라 식자공이 활자를 골라 뽑고
순서, 위치, 자간, 행간 등을 맞추어 짠 판(form)을
인쇄공에게 넘기면 그 판을 인쇄기 위에 얹은 뒤 잉크를 골고루 바른 후 종이를 얹어 찍어내야 하고,
그 뒤에도 제본과 여러 단계의 유통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독자의 손에 전달되는 "물건"이다.
인쇄공에게 넘기면 그 판을 인쇄기 위에 얹은 뒤 잉크를 골고루 바른 후 종이를 얹어 찍어내야 하고,
그 뒤에도 제본과 여러 단계의 유통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독자의 손에 전달되는 "물건"이다.

16세기 인쇄소의 풍경
이처럼 복잡한 책의 생산 과정을 거치는 동안 글쓴이의 추상적인 사고와 감정은
잉크와 종이 등의 매우 구체적인 물질의 형태로 독자에게 전달되며
출판의 각 단계를 담당하는 여러 사람들의 조정을 받거나 그들과 상호 작용한다.
한권의 책이 갖는 의미를 작가(author)의 단일한 생각이나 의도로 환원시킬 수 있다는 믿음이
작가와 글쓰기에 대한 소위 낭만주의적 이데올로기 (Romantic ideology)의 한 단면인데 반해,
이른바 텍스트의 사회학(sociology of text)으로 지칭되는 문학연구의 한 방법론에 따르면
책의 전체적인 의미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비단 작가가 주도하여 생산한
문자 중심의 텍스트 뿐만 아니라, 삽화가의 그림이나 표지 디자인 등의 그래픽 요소,
그리고 편집자의 해설이나 각주, 혹은 출판업자의 계획에 따라 누군가가 첨부한 머리말 등의
다른 문자적 요소들까지도 두루 포함한다.
물론 독자로서 내가 책의 여백에 깨알 같은 글씨로 독서의 흔적을 남기는 것도
우리가 책이라고 부르는 그 인공물이 거쳐가는 길고 복잡한 순환 과정의 일부다.
그러니 내가 책의 여백에다 빽빽하게 메모하길 좋아하는 원초적인 이유를 말한다면
그런 행위를 통해 비단 한 사람의 정신뿐만 아니라
그런 행위를 통해 비단 한 사람의 정신뿐만 아니라
이처럼 하나하나의 책들마다 담겨있는 독특한 역사와도
직접 조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직접 조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이미지는 서양의 책의 역사를 말할 때 1450년경 인쇄기(printing press)의 발명과 함께 자주 언급되는
그 유명한 15세기 구텐베르크 성서의 제2권 속 예레미야서의 한 장이라고 한다.
이 책의 역사 중 어떤 시점에 일어난 일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어떤 사람이 이 귀한 책의 여백에도 주석을 달아놓았단다!
그리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다른 독자의 주의를 끌기 위해
손모양의 그림까지 작게 그려넣었다. (소매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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